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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영展_사진의 길-미야기현에서 앨범을 줍다 《20세기 소년》과 《사진기술개론》이라는 두 권의 책은 박진영의 개인전 <사진의 길 - 미야기현에서 앨범을 줍다>를 이해하는 흥미로운 단서가 된다. 《20세기 소년》은 1970년대 초반 소년들이 생각한 인류 멸망이 실현되는 과정을 21세기 시점에서 그린 일본의 대표적 만화이고, 《사진기술개론》은 1979년에 초판이 발간된 사진과 카메라의 기초적 이론과 기술을 설명한 입문해설서다. 작가는 급류에 휩쓸릴 뻔한 위험 속에서도 바위 위에 올려놓은 《20세기 소년》을 사진으로 찍어냈고, 밑줄과 메모가 빼곡한 《사진기술개론》은 그러한 사진가로서의 여정 속에서 언제나 기본이 되어 준 작가의 신념을 대변하는 책이다. 하나는 사진 속에, 다른 하나는 사진 밖 전시장에 놓인 이 책들은 작가에게 개인적 의미를 지닌 동시에 전시 전반을 읽어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전시는 지난 해 대지진과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일본 북동부 지역을 찍은 사진들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사진들은 당시의 상황을 멀리서 스펙터클한 광경으로 바라보거나 재해의 참혹한 현장으로 가까이 들여다보는 예의 보도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났었던' 최소한의 흔적만을 간직한 채 풍경과 정물의 정제된 모습으로 무덤덤하게 우리 앞에 마주한다. 수마(水魔)가 휩쓸고 간 도시 건물의 폐허와 복구가 진행되면서 건물 잔해와 함께 드러난 주인 없는 물건들이 작가의 카메라 앞에 놓였다. 피사체가 된 대상들 중 특히 두드러지는 두 가지는 ‘사진’과 ‘아이들’에 관한 것이다. 카메라, 사진액자, 사진관이 있던 자리, 그리고 전시의 출발점이 된 미야기현에서 주운 카네코 마리의 앨범이 ‘사진’에 관한 것이라면, 일본 전통의 초등학생용 가방 란도셀과 그 가방을 맬 법한 동상좌대 위 소년들, 그리고 작은 조각상, 정을 비롯한 연장, 음료수병 등 교실에서 발견되었을 것 같은 물건들 모두가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사진과 아이들은 각각 죽음과 삶으로 대변된다. 사진은 본디 어떠한 대상이 ‘거기 있었다’는 현존의 증거로서 그 자체 현재이지만 반드시 과거일 수밖에 없으며 태생부터 존재의 죽음을 상정한다. 앙드레 바쟁은 사진을 데스마스크에 비유해 “빛을 매개로 사물의 흔적을 뜨는 것”이라 했고, 롤랑 바르트는 “죽음은 사진의 본질(eïdos)”이라 칭한 바 있다. 이러한 사진의 죽음의 본성에 더해 실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낸 자연재해의 흔적을 담은 이 사진들이야 말로 죽음에 대한 ‘이중적 강조’에 해당한다. 공동묘지 사진과 나란히 걸린 <사진관이 있던 자리>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그러한 사진 찍기 행위가 수없이 일어났었을 장소의 흔적과 그마저 곧 사라지게 될 가까운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사진의 죽음의 본성을 극대화한다. 그러나 한 아버지가 만든 딸의 성장앨범이 작가에게 작업의 동력을 부여했던 것은 이러한 죽음의 본성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불러내어 현재의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존재 역시 사진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사라지는 것들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며, 그 상징적 주체는 아이들이 된다. 파손된 뒷모습의 자유의 여신상 사진과 대비되어 걸린, 빈 좌대 위에 올라선 두 아이의 사진에서 우리는 방사선에 노출된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눈부시도록 해맑은 그들의 미소와 주변에 흩뿌려진 야속하리만치 아름다운 벚꽃 이파리들을 함께 바라본다. 이렇듯 작가는 자신의 시선에 들어와 박힌 개별 대상들의 사진을 통해 2011년 대지진 직후 일본을 보여주고, 나아가 사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작가가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사진의 두 가지 측면, 바르트의 용어를 빌자면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모두 의식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박진영의 사진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일본 대지진의 흔적이라는 개념화된 주제, 즉 스투디움을 찾는 동시에, 작가와 관람객에게 각기 다르게 다가와 그들을 찌르는 아주 작은 부분, 즉 푼크툼을 우연히 만난다. 우리의 시선을 사진 앞에 오래 머물게 하고 가슴을 휘젓는 것은 사진의 개별성(푼크툼)이지만, 그 사진들이 기록하는 정보가 지니는 의미의 보편성(스투디움) 역시 그와 견주어 뒤지지 않는 가치를 지닌다. 이는 개인적이고 온전히 재현될 수 없는 기억의 속성상 허구에 불과한 “집단적 기억”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진이라는 “시각적 등가물”이 필요하다는 수잔 손택의 생각과도 유사한 맥락에 있다. 전시는 이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잘 짜여져 있다. 이상 기후 현상을 찍은 <초여름에 내린 눈>과 바위 위 《20세기 소년》을 포착한 <찍다가 죽을 뻔한 사진>이 전시의 처음과 끝을 열고 맺으며, 그 사이를 일관된 흐름으로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는 유사한 소재의 사진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또한 실제 사진앨범과 함께 슬라이드 영상으로 보여주는 '카네코 마리의 방'과 작가 스스로 사진에 담을 수 없던 한계를 밝히며 제시한 실제 오브제 등은 전시의 구체적인 주제와 사진 매체 자체에 대한 성찰, 나아가 사진이 미술전시장에 들어오는 효과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다. 그것은 객관적인 일본 지형을 제시하는 동시에 작가의 사적(私的) 기록을 보여주는 전시장 한 켠의 지도가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성과 개별성의 이중적 혼재를 함축적으로 반영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그렇게 작가 박진영은 미야기현에서 주운 하나의 앨범으로부터 출발해 개인적 관심과 사회적 의미가 공존하는 ‘사진의 길’을 우리에게 내보이고자 한 것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 ![]()
“자율적 미학을 가진 ‘순수한’ 사진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들은 종종 모순에 빠진다. 왜냐하면 사진 행위의 특수성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사진의 접근 가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거부가 결국은 회화와 같은 공인된 예술의 미학적 규범들을 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1) 다양한 예술문화의 생산과 수용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그 중 유독 사진을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양자 구분에서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고유한 성격의 ‘중간 예술(Un art moyen)’로서 규정하고 그 특징을 상세히 고찰하였다. 사진은 회화나 음악과 같은 공인된 예술 활동과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하며, 사진을 찍는 개인이 속한 계급과 직업 또는 예술적 당파의 가치체계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보이는 사회학의 연구대상이라는 것이다. 사진을 하나의 자율적 미학을 가진 ‘순수한’ 영역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사진의 본성과는 무관한, 전통적인 의미의 미학적 규범을 빌려 온 비현실적인 고찰이라는 부르디외의 주장은 오늘날 여전히 설득력을 지닌다. 회화를 포함한 시각예술 전반이 정치, 경제적 요소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성의 영역이라는 믿음 자체가 붕괴한 지 오래이지만, 사진은 그러한 시각예술 중에서도 자율성과는 거리가 먼 고유한 다층적 입지를 지녀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9세기 등장 이후 사진은 곧 일부 귀족계급에 국한된 초상화를 대신하여 중산계급 이하의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급되었으며, 이후 작동과 접근의 용이성으로 인해 다수의 대중이 촬영 대상뿐 아니라 주체가 되는 ‘예술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전문적인 분야에서의 사진은 대략 예술(순수), 상업(광고), 보도(저널리즘)로 구분되어 비교적 고립된 각 영역 내에서 발전되어 왔으나, 20세기 이래 이들 영역 간 구분 역시 상당부분 흐려지고 있다. 20세기 들어 크게 증대된 디자인, TV, 광고, 패션, 사진, 영화, MTV, 인터넷에 이르는 일상생활 내 대부분의 이미지와 매체가 회화, 조각, 건축 등과 함께 ‘시각문화(visual culture)’라는 보다 큰 틀 안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영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각문화의 틀 안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간의 본질적인 구분이나 매체 간의 서열을 부정하는 인식이 상당부분 공유되었다. 그 결과 사진 역시 현대미술의 중요한 매체로 인식됨은 물론, 다양한 시각문화 분야를 넘나드는 사진매체의 사용에 따라 사진의 영역 간 구분 또한 일정 정도 흐려지게 된 것이다. 특히 모든 시각문화 분야에서 상업적인 요소가 크게 증대되었으며, 사진에서 역시 패션과 광고 위주의 상업사진과 사진계나 미술계 내에서만 다루어져 온 순수사진 사이의 교차적 활동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 상징적인 인물로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 )을 꼽을 수 있다. 신디는 고유의 셀프 포트레이트 형식의 사진작업으로 현대미술 내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연구되며, 동시에 인접 장르와의 경계를 허물고 사진 내 영역 간 구분을 붕괴한 인물로 시각문화 전반에서 언급된다. 1940-6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장면을 작가 스스로 분하여 흑백 초상사진으로 재현한 <무제 영화 스틸(Untitled Film Still, 1977-1981)>은 모마(MoMA)에 전작 69점이 소장되며 그녀를 유명작가로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또한 2004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바 있는 가로로 긴 대형포맷 12장의 컬러연작사진 <Centerfolds/Horizontals>는 패션잡지나 포르노잡지에서 자주 사용되는 중간에 삽입되는 접지사진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이 연작은 1981년 미술잡지 《아트포럼》의 주문으로 행해진 작업이다. 특히 신디는 1980-90년대 내내 고유한 형식으로 다양한 패션사진연작을 시도했다. 1983년 《인터뷰》지에 실린 미국의 패션 기업가 다이안 벤슨(Dianne Benson)의 주문으로 장 폴 고티에(Jean-Paul Gaultier)와 콤므 데 갸르송(Comme des Garçons)의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이나 같은 해 《보그》지에 실린 프랑스 디자이너 도로시 비스(Dorothée Bis)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의 경우, 작가 스스로 넋이 나갔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느낌의 모델로 분해 특유의 기이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발산함으로써 기존의 화려한 패션사진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사진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러한 예술사진과 상업사진 영역의 교차적 활동은 20세기 초반부터 《하퍼즈 바자》와 《보그》를 비롯한 잡지매체를 중심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정물사진을 찍듯 인물을 클로즈업한 초상사진으로 유명한 어빙 펜(Irving Penn, 1917-2009), 유명인물의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포착한 단색 배경의 정면 사진으로 잘 알려진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 1923-2004), 에로틱하고 스타일리쉬한 도시 남녀의 초상을 담아내기로 유명한 헬무트 뉴튼(Helmut Newton, 1920-2004) 등이 1950-70년대 흑백사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의 사진은 주로 유명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한 패션사진이거나 당대 사회의 유명인을 모델로 하여 특정한 순간을 포착한 초상사진이 대부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개별 사진가 고유의 형식적 특징을 담지한 예술사진으로 인정받아 전세계 유명 미술관과 갤러리에 적극적으로 전시, 소장되어 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패션, 광고, 영화포스터 등 상업분야의 사진이든, 순수하게 전시되기 위한 예술사진이든 카메라 앞에 선 인물의 정체성에 최대한 접근하여 그 본질적인 특징을 잡아내고자 하는 날카로움과 진지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러한 인물 위주의 흑백사진에 이어 컬러사진의 등장으로 보다 적극적인 예술적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단지 인물뿐이 아니라 인물이 속한 화면 전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작가 고유의 스타일이 부각되는 이른바 '예술상업사진'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만 해도 아서 엘고트(Arthur Elgort, 1940- ), 애니 레보비츠(Annie Leibovitz, 1949- ), 닉 나이트(Nick Knight, 1958- ), 위르겐 텔러(Juergen Teller, 1964- ), 데이비드 라샤펠(David LaChapelle, 1963- ), 테리 리차드슨(Terry Richardson, 1965- ) 등이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들의 사진은 패션이나 광고 분야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과 상상력이 넘쳐나는 예술적 표현으로, 흔히 패션디자이너나 광고주가 정해놓은 한계로 인해 창의적인 결정이 어려울 것이라는 상업사진에 대한 선입견을 철저히 위반한다. 상업적인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들은 현대미술에서 논의되는 여타의 예술사진과 마찬가지로 사진작가의 개별화된 독창적 스타일과 형식성이 돋보인다. 사실상 시각적 결과물만으로 예술사진과 이들 상업사진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애니 레보비츠의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연출사진은 그레고리 크루드손(Gregory Crewdson)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류의 것이며, 현재 국내 전시 중인 데이비드 라샤펠의 사진은 생생한 색감과 반복적인 패턴의 배경이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를 연상케 하면서도 팝아트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고유한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상업사진으로 분류되는 것은 이렇듯 사진작품의 내재된 특징보다는 그것이 특정한 의뢰인을 전제로 하여 상업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작품 외적인 측면에 기인한 면이 크다. 그러나 회화 역시 주문(commission)과 후원자(patron)의 오랜 전통을 지녔으며, 오늘날 그 어떤 예술 장르 역시 상업적인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때 사실상 이는 예술사진과 상업사진 구분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의 구분은 유효하며 일부 유명 작가를 제외한 대다수 상업사진작가들이 예술사진의 영역으로 들어오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는 사진의 등장 이후 오랫동안 확립되어 온 사진에 관한 예술과 산업의 대립적 구도2)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며, '중간 예술'이라는 사진의 다층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조차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을 각각 고급예술과 대중예술로 구분하는 위계적 관점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사진을 찍는 생산자 집단 내에서 분리 운용되어 온 장(field)의 논리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빌자면,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의 장은 각 장의 고유한 논리에 따라 오랜 시간 개별 생산자들 간의 투쟁과 관계에 의해 공고하게 질서 지워진 각각의 예술생산의 하위장들(subfields)로서,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상이한 장에 진입하기란 용이하지 않으며 원래 속한 장에서 높은 명예, 즉 상징자본을 축적한 사람만이 그러한 상징자본을 바탕으로 보다 쉽게 다른 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이러한 예술생산장이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수용자들이 속한 장의 구조와 함께 유동적으로 변화해갈 수 있음을 더불어 지적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의 경계구분을 흐리고 시각예술 전반으로 관심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사진작가뿐 아니라 사진을 감상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관객이 함께 의식의 범위를 넓혀감으로써 예술제도의 전반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피적인 변화양상에 휘둘리거나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닌 셈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 ![]() 다양한 알레고리의 충동과 유희
최종운은 이러한 알레고리와 연관된 포스트모던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현대미술 작가다. 조각을 전공했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조각가와는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설치, 영상, 회화, 사진 그 어느 한 장르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기도 적절치 않다. 오히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일관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알레고리적 태도'일지 모른다. 작가의 대표작이자 개인 홈페이지 주소이기도 한 <이것은 뜨겁다(THIS IS HOT)>2)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동파이프를 자르고 연결해 만든 ‘THIS IS HOT’이라는 이 문자조각은 2006년 런던 슬레이드(Slade) 대학원 졸업전시에서 처음 선보였던 작품이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알레고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먼저 ‘THIS IS HOT’이라는 기표와 ‘이것은 뜨겁다’라는 기의 사이에 적용되는 자연적 연결 원리를 위반하듯 실제 파이프는 뜨겁지 않았다. 따라서 그 문장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닌 작품 자체를, ‘뜨겁다’는 물리적인 온도가 아닌 ‘새롭다’ 혹은 ‘강렬하다’는 작품에 대한 평가적 의미를 가리킨다. 사실상 그 안에는 앞서 작가가 제작했던 작품이 학교당국의 제지에 의해 철회된 또 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작가는 원래 대한민국 지도의 산맥 형태로 동파이프를 연결하고 열선이 설치된 파이프를 따라 흐르는 촛농이 파이프 아랫부분에 뚫린 구멍으로 떨어져내려 바닥에 새로운 촛농산맥을 만드는 설치작품을 고안했다. 그러나 학교는 안전상의 이유로 전시를 불허했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 의미를 담아 그는 동일한 재료지만 뜨겁지 않은 <이것은 뜨겁다(THIS IS HOT)>라는 문자조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작품 안에는 ‘이 전시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의 또 다른 텍스트가 존재하는 셈이다. 한편, 이러한 다층적으로 중첩되는 이 작품의 알레고리적 성격은 한 발 더 나아가 기존 미술사에 대한 차용 혹은 참조의 측면에서 또 한 번 드러난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어긋남과 문자기호와 이미지기호의 차이 등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1929) - 파이프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적힌 회화작품 - 와 조셉 코수스의 <하나이자 셋인 의자(One and Three Chairs)>(1965) - 실제 나무의자, 그 의자의 사진, 문자로 적힌 의자의 사전적 정의 세 가지로 이루어진 개념미술 작품 – 의 방식을 가져 와 자신 나름의 보충적인 의미를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3) '뜨겁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지만 '뜨겁지 않은' 파이프와 같은 아이러니는 최종운의 작업 전반에서 드러난다. <고요한긴장(Calmtension)>(2005)이나 <수직의 바다(Vertical sea)>(2010)와 같은 제목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듯 작가는 줄곧 아이러니한 두 가지 요소를 양립시킴으로써 그것들이 상충(相衝)하는 가운데 빚어지는 모호한 의미를 추구해왔다. 소비사회의 대표적 대량생산품이자 환경오염의 주된 요인인 콜라, 엔지오일, 액체세제, 섬유유연제, 식용유 등의 액체 공산품을 재료로 사용한 작가의 ‘액체회화’4) 연작 제목의 대부분은 바다, 폭풍, 태양, 수평선, 바람 등의 자연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 대부분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의 색면회화 형태를 띤다. 예컨대 자연물을 상징하는 진흙과 인공물을 상징하는 섬유유연제의 이중층으로 이루어진 '액체회화'의 제목은 사막의 모래바람을 연상케 하는 <달콤한 바람(Sweet wind)>(2008)이다. 오웬스는 “어떤 단어들이 그들과 뜻이 반대되는 단어들을 의미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인식은, 이미 그 자체로서 근본적으로 알레고리적이다”5)라고 말하며 아이러니가 알레고리의 하나의 변형된 형태임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슬픈 풍경(Sad landscape)>(2008)이라는 서정적 영상작업이 사실은 단지 결대로 찢어낸 검은 종이테이프를 찍은 것으로 당시 태안 기름 유출 사고를 담고 있다거나, 마찬 가지 감상적인 제목의 <내 마음 속 기억(The memory of my mind)>(2010)이 자작나무 합판을 구릉지처럼 조각도로 파내어 이제는 기성품이 된 자작나무 원목이 자랐던 산악지대의 풍경을 떠올리도록 한 것처럼, 작품의 제목과 재료, 형식과 의미 사이의 알레고리는 그의 작업 전반에 산재(散在)해 있다. 한편 이러한 알레고리적 특징은 작가의 최근 장소특정적인(site-specific) 작업들에서 한층 더 잘 드러난다. 제한된 기간 동안 특정한 장소에 설치되는 장소특정적인 작업은 일시성(temporality)을 전제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사진이나 영상의 기록을 동반한다. 이러한 양자 간의 관계를 일컬어 오웬스는 “안정되고 고정된 이미지 속에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을 고착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말하며 사진이 지닌 알레고리적 잠재력을 강조한다. 최종운 역시 설치와 사진의 방식을 함께 취한다.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먼저 대표적 장소특정적 설치-사진 작업 <버블(Bubble)>(2011)에서 작가는 이전에는 화려했으나 지금은 그 명성이 사라진 장소들을 찾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면도거품(shaving foam)을 이용한 비정형의 대형조각을 매달았다. <버블>이 처음으로 실현된 장소는 현재 영업을 하지 않고 방치된 지하철 3호선 남서울터미널역의 지하상가 앞이다. 2주의 설치기간 동안 거품은 점차 잦아들어 결국 약간의 흔적만을 남긴 채 풍선으로 된 골조를 드러냈고, 최종결과물로는 설치장면의 사진이 남았다. 이 작업은 10개의 다른 장소에 설치되고 총 10장의 사진작업으로 완성될 연작으로서,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대량생산품을 재료 혹은 소재로 삼는 <슈퍼마켓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 중이다. 또 다른 장소특정적 설치-사진 프로젝트 <있었던...(There was...)>(2011)은 그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어떠한 사물이 원래 있었던 자리와 흔적으로서 남은 현재의 상태를 서로 직면하게 하는 일시적인 설치로서 그 역시 최종결과물은 사진이다. 첫 작업은 40년이 다 된 가로수가 베어지고 난 둥치를 찍은 사진과 베어진 실제 나무 밑기둥을 마주 보게 한 설치로, 이 상태를 다시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작업은 완결된다. 동일 연작의 차기작으로 작가는 전자제품과 그것이 담겨있던 포장상자를 마주 보게 하는 설치-사진 작업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이처럼 현재 진행 중인 두 프로젝트 모두는 ‘과거에는 존재했던 것이 현재에는 부재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가게들과 거품이 잦아들어가는 설치작품을 나란히 보여주거나 베어진 나무와 그 밑동을 함께 보여주는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있고 없음,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이질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일깨우는 전형적 알레고리에 해당한다. 현재를 위해 과거를 되살리려는 욕구야 말로 알레고리의 가장 근본적인 충동임을 떠올릴 때 과거와 현재의 틈 사이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작업들의 알레고리적 의미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전형적인 알레고리 방식은 <같고도 다른(Same&different)>(2011)이라는 설치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A4용지를 각각 1000장씩 구겨지기 전, 구겨진, 다시 펴진 세 가지 다른 상태로 세 개의 테이블에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특정한 상황을 통해 작가는 우리 삶에서 흔히 겪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행위가 가해진), 사건이 끝난 후 흔적이 남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상태를 보여준다. 이것은 또 다시 코수스의 <하나이자 셋인 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오브제, 문자, 이미지 세 가지 종류의 의자가 결국 모두 하나의 의자를 지칭할 때 그것은 '하나이자 셋인 의자'였듯이 구기기 전, 구겨놓은, 구겼다 편 세 가지 상태의 종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질의 종이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다른 종이로 보느냐 하나의 같은 종이로 보느냐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려있으며, 작가는 일상에서 종종 마주치는 이러한 '같고도 다른' 상황에서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하기 보다는 관점의 차이로서 인정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듯 하다. 사실상 알레고리적 방식의 핵심적인 의의는 이러한 이질성과 관점의 차이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중첩될 때" 발생하는 알레고리는 작품이 하나의 정해진 의미로 환원되지 않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우연적이고 모호한 의미를 무수히 생성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차용, 장소특정성적 설치와 사진 등 현대미술의 알레고리적 방식을 다양하게 구사하며 소재, 매체, 형식,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최종운의 작업은 결국 이러한 '차이에 대한 긍정'으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대상도, 어떠한 관계도 전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6)는 알레고리에 관한 발터 벤야민의 언급은 그의 작업 전반에 큰 울림을 준다. 앞으로 이와 같은 작가의 다양한 알레고리적 충동과 유희가 어떻게 변주되어 나갈지 관심과 기대로 지켜볼 일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 ![]() 우리 시대 근대성에 관한 자아상(自我像) 오늘날의 '액화되고' '흐르고' 분산되고 흩어져 있으며 규정에서 풀려난 근대의 형식이..., 결속 끊기와 자본과 노동의 연계가 헐거워진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가벼운, 자유롭게 떠다니는 자본주의의 도래를 예견케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1)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안정적이고 견고하며 틀에 짜인 초기의 '고체적' 근대와 대비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21세기를 '액체 근대'라고 지칭하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시작된 근대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 그 형태를 바꾸어 질서가 아닌 무질서를 규칙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김효숙의 회화는 바우만의 '액체 근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21세기 전지구적인 상황이기 이전에 매우 구체적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부유하는 나의 도시>2)라는 제목의 김효숙의 회화 대부분은 물질과 인간이 거대한 회색 덩어리로 한데 섞여 무질서한 듯 질서 있게 화면을 부유한다. 그러나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수 혹은 복수의 인간형상과 물질의 파편들은 각기 구분되는 개별자로 존재하며, 그와 동시에 서로 묘하게 얽혀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인간과 비인간을 관계 짓는 방식이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 쓴 그림 속 모든 인물에게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익명의 비인간적 인물묘사와 달리 물질의 파편들은 사실상 그 형태가 조금씩 모두 다르고 그들이 얽혀 있는 전체적인 형상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운동성이 부여된다. 이와 같이 물질과 비물질의 고정된 성격을 넘다드는 양자 간의 고유한 방식의 혼재가 두드러진 김효숙의 그림들은 바우만이 말한 "자본과 노동의 연계가 헐거워진... 자유롭게 떠다니는 자본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질의 파편으로 대변되는 '자본'과 익명의 인간으로 대변되는 '노동', 그리고 헐거워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서로를 옭아매고 있는 그들 간의 '연계'가 부유하는 화면은 그야말로 이 시대 자본주의 사회를 정확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김효숙의 회화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기 보다는 물질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때 물질은 '고체 근대'를 대변하는 토건과 개발의 잔해들이다. 그것들은 건물이나 교각의 골조나 일부분이고, 벽체, 파이프, 기둥, 창문, 철망, 철근 등 수많은 건축자재이다. 모든 소재들은 현실에서는 '축조'를 위해 사용되지만 이 그림에서는 '분해'되고 '해체'되어 화면 내 질서를 위해 새롭게 쓰인다. 또한 철, 알루미늄, 고무, 벽돌, 유리, 플라스틱, 스티로폼 등 재료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모두는 그림에서 동일한 회색조로 재질상의 구분 없이 쓰여 콘크리트로 상징되는 개발 위주의 근대화의 풍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심지어 사람마저도 동일한 색조로 그 속에 묻혀 하나의 풍경으로 제시되는 이 그림들은 사실상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와는 차이가 있다. 그것들은 분명 파편화되고 개별화되어 예측불가능하고 불안정하게 떠다니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으며 통제와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김효숙은 21세기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여전히 성장통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현실을 고유한 감각으로 새롭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화면에는 상이한 요소들이 결코 명확하게 구분해낼 수 없도록 모호하게 공존한다. 부분적인 요소들은 직선의 고체적 성향이 강하지만 그것들의 전체구도는 무중력 상태에 있듯이 공중에 떠있거나 구심점을 두고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등 공기의 영향을 받고 때로는 물 위를 부유하듯 곡선의 형태를 띤다. 또한 회색조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덩어리 사이로 배경색과 동일한 원색의 액체가 흘러내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질성과 혼종성은 그녀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의 본질을 본능적 감각으로 해석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와 같은 작가의 현실 반영과 고유한 해석에는 작업방식이 기여하는 측면이 크다. 원색의 배경 위로 회색조의 비현실적 형상이 전면에 드러나는 김효숙의 그림은 일차적으로 색, 형태, 구도, 구성 등 모든 면에서 작가의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우리 사회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양면적인 특징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사진촬영을 통한 철저한 현장조사를 거치는 작업방식에서 상당부분 비롯된다. 어릴 적부터 여러 차례 개발 지역에 거주하며 공사현장을 목격해왔다는 작가는 이후 현재까지 새로운 방식으로 가속화된 건설 현장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이를 관찰해왔다. 단순한 신축건축공사 뿐 아니라 재개발을 위한 철거와 재건축의 과정, 그리고 다양해진 건축자재들과 건물 형태들로 인해 작가의 시야에 포착된 시각자료들은 방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게 되었고, 그녀는 이러한 자신만의 저장소에서 꺼낸 이미지들을 화폭에 재구성해낸다. 일차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와의 거리에 따라 건물(건물의 일부분)이나 자재의 크기가 달라지며, 그림을 그릴 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실제 대상의 크기와 거리의 현실적 질서는 또 한 번 파괴된다. 계단과 손잡이가 비슷한 크기로 그려지고, 도로가 철근보다 가늘게 묘사되며, 전체 건물구조가 자재의 일부분보다 작게 그려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제 대상을 참고로 하되 작가의 의도와 그리는 과정에서의 우연에 따라 변형된 화면 구성이 바로 김효숙의 그림을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적 위치에 놓이게 한다. 그럼으로써 여전히 토건과 개발을 중심으로 한 물질적 성장을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간접적이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한편, 작가가 인물을 묘사하는 고유한 방식은 그녀의 회화를 단순한 (재)개발 풍경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작가는 대부분의 그림에서 인물을 비율상 다른 개별 파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림으로써 대상의 거리와 크기가 파괴된 화면의 새로운 질서는 인물과의 대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인물은 절대 그림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고 오히려 파편들 사이에 묻히는 편이다. 그리고 모자를 뒤집어 쓴 사람들은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발은 대부분 고무장화로 감추어져 있으며 손을 비롯한 다른 신체부위도 결코 노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개성과 생기를 나타내는 살과 피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각기 다른 특정한 동작과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고 전면을 향할 때도 모자에 둘러싸인 채 얼굴을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여러 신체부위들은 살이 아닌 물질의 파편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예컨대 <부유하는 나의 도시>의 여러 화면에서 특정한 물질의 파편들이 얼굴이나 팔에서 쏟아져 내리거나 그 부위들을 대신하고 있으며, <마지막 소통>이라는 작품에서는 전경에 뒤돌아 누워있는 인물의 살짝 드러나는 허리부분이 살 대신 주변의 건물잔해들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인물묘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와 물질의 우월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인물과 주변 물질과의 관계 묘사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더욱 강화시킨다. 대부분의 그림에서 인물은 파편들에 묻히거나 감싸이고 휘감기며 때로는 그러한 파편들이 신체를 훼손시킬 듯 날카롭게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움츠려들고 소극적이어 보이는 인물들은 이러한 주변의 물질 파편들에 의해 잠식되거나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일방적으로 그것들을 거부하거나 밀어내기보다는 피아(彼我)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로 한데 얽혀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속 우리의 자아상(自我像)으로 읽혀지기에 충분하다. 이를테면 그것은 신문에서 보도되는 무분별한 도시개발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아파트 분양권 추첨을 위해서 새벽부터 줄을 서고 오래된 주택보다는 편리한 아파트를 선호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김효숙의 회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이러한 자본과 노동,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시각적 알레고리는 이상화된 '액체 근대'도 종결된 '고체 근대'도 아닌 그 중간적 형태로서의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의 현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바우만이 그 특성상 전체주의가 될 경향이 다분하다고 보았던 "무겁고, 고체 같고, 농축되고, 체계적인 근대성"3)이 적으로 삼았던 "우연성, 다양성, 불명확성, 변덕스러움, 특이성"4)으로 대변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은 오늘날 획일적 전체주의를 누르고 단연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질서 지워짐으로써, 온전히 실현되기 보다는 그에 상응하는 개인의 고립과 소외가 문제시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전지구적 추세로서의 '액체 근대'를 지향하면서도 여전히 '고체 근대'의 특성 또한 다분히 견지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재)개발을 상징하는 물질의 파편들과 고립된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익명의 인간이 이질적면서도 동질적으로 한데 얽혀 부유하는 김효숙의 회화는 '액체적'인 동시에 '고체적'인 이 사회 근대성의 양 측면 모두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단지 암울하기만 한 것인가? 판단은 보는 사람에 달려 있다. 어쩌면 그 실마리를 전면에 들어찬 회색빛 덩어리 너머로 보이는 밝은 원색의 배경과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전경에 대비되는 밝은 배경을 '액체 근대'에 대해 여전히 작동하는 '환상'으로 볼 것인가,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에 대한 '희망'으로 볼 것인가의 시각차에 따라 그 해석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 ![]() 박기진의 전시 <발견(Discovery)>은 중앙아프리카의 호수 말라위와 탕가니카, 그리고 두 호수에 사는 담수어종(種) 시클리드로부터 시작한다. 두 호수는 과거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가 지각 변동으로 분화되었고, 그 곳에 살던 시클리드도 두 호수로 갈라져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며 상이한 어종으로 진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작가는 두 호수를 물 속에서 하나의 통로로 연결하여 헤어졌던 물고기들을 만나게 하고, 수면에 물고기를 위한 부표(浮標) 형태의 전망대를 띄우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이 중 이번 전시에는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조망도와 함께 탕가니카 호수 바닥의 통로입구에 놓일 거대한 우물과 부표형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사실상 작가의 주된 관심은 프로젝트의 온전한 실현보다는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상징적 함의에 있다. 작가는 정체된 두 호수를 서로 연결하여 그 곳의 물을 순환하게 하고 언제나 관찰의 대상이 되는 물고기 - 시클리드는 대표적 관상용 열대어다 - 에게 바라볼 수 있는 주체의 위치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박기진의 이러한 시도는 인간과 자연의 균형적 관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연장선상에 있다. 그간 작가는 인간과 자연이 이상적으로 공생하는 뉴질랜드의 카이코라, 오염되지 않은 깊은 해협에서 만난 향유고래, 녹아내리고 있는 '구슬픈 빙하', 열대우림과 해안이 공존하는 브라질의 바이아 등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일관된 주제에 천착해왔다. 그러나 이전 작업들이 실존하는 장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했음에도 반추상의 조각물로 제시되어 주로 작가의 상상을 기반으로 한 예술적 표현으로 여겨졌다면, 이번 전시는 구체적인 기능적 장치를 예술적 표현과 혼재하도록 함으로써 실제와 허구의 중간적 위치에서 관객을 혼란케 한다. 실제처럼 보이는 우물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물결이 투사되는 영상작업이고, 그저 조형물처럼 보이는 전망대는 기성의 부표 설계도에 입각하여 정밀한 기능적 요소들을 탑재해 만든 실제 장치다. 이러한 상이한 존재론적 층위가 교차하는 작품의 양상은 관객의 판단을 유보시키고, 다만 그들에게 싸늘한 전시공간을 막연히 호수의 깊은 물 속으로 느끼게 할 따름이다. 박기진은 특유의 '육중한 섬세함'으로 보이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홀로 철저히 계획하고 실행하며, 이러한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明)'이 아닌 미처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발견(見)'이라 부르고 있다. 박기진의 <발견>은 그림자가 그 물체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실제지만 빛이 너무 밝거나 어두우면 사라지고 만다는 점에서는 허상인 것처럼, 보는 사람이 어떠한 배경지식을 갖고 어떠한 감수성으로 접근하냐에 따라 사실에 근거한 실제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한 허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전시는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 않아 이전 작업을 추적해가고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게 한다. 이러한 모호함과 확장성이 누군가에게는 불친절함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열린 가능성으로 여겨질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도 그의 '발견'은 계속될 것이며 우리는 그 여정을 긴 호흡으로 지켜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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