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연속체 무한 기둥(Space-Continuum-Infinite Column)> 2000
이원성이 낳은 무한기둥
“영일영일영일(010101)…”
영(0)과 일(1)이라는 두 개의 숫자 조합으로 모든 정보를 전달하는 디지털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을 바탕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내용을 정확하게 나타낸다. 또한 어린아이는 특별한 교육 없이도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동그라미와 직선을 그려낸다. 그 후 동그라미가 여러 개 이어져 꽃이 되기도 하고 직선들이 각을 이루어 세모와 네모가 되기도 하면서 그 형태가 풍부해진다.
박은선의 작품은 디지털의 영(0)과 일(1) 혹은 어린아이의 동그라미와 직선을 연상케 하는 ‘구’와 ‘원기둥’이라는 기본형태에서 시작된다. 작은 구가 여러 개 이어져 하나의 긴 기둥을 이루기도 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 작은 구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끼어 있기도 하며, 하나의 원기둥 속에 또 다른 원기둥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변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구와 원기둥이라는 두 가지 기본 골격 안에서다.
형태만큼이나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색이다. 형태에서 보이는 ‘이원성’이 색에서도 확연하다. 그의 전작품은 같은 폭으로 된 다른 두 색이 반복되는데 그 색은 보색도 유사색도 아니지만 묘하게 어우러진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색이 아니라 재료 고유의 ‘자연색’이라는 점이다. 그 재료는 다름아닌 대리석. 1990년 석고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은선은 1994년부터 최첨단 소재들이 난무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대리석을 고집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고집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자신한다. 두 가지 색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도 보는 사람이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것이 대리석 고유의 자연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 아무리 인간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만든 그 어떤 대단한 것이라도 자연 앞에 서면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닌가.
구와 원기둥이라는 단순한 형태와 단 두 가지 대리석의 고유색으로 이루어지는 박은선의 작품, 그 키워드는 다름아닌 ‘이원성’과 ‘자연스러움’이라 하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단순한 구나 원기둥에 그치는 작품 외에 구들이 연결되어 만드는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원기둥, 그리고 원기둥 사이에 같은 지름의 구들이 끼어 있는 변형된 기둥이 있다. 물론 모든 작품에 두 가지 자연색의 반복은 공통된다. 구와 원기둥이 약간씩 변형되면서 ‘결합’되는 이러한 작품들은 어떠한 ‘연속성’을 지니게 되고, 박은선은 이러한 작품들에 〈무한 기둥(Infinite Column)〉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의 최근작은 대부분 이러한 ‘무한 기둥’시리즈다. 이원성이 연속성을 낳고 연속성은 곧 무한 기둥을 낳는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작가의 성향은 형과 색에서뿐 아니라 작업기법에서도 나타난다. 처음 박은선의 작품을 접했을 때 그 작업과정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매끄러운 표면과 상반되는 거칠게 갈라진 틈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작업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먼저 색이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은 대리석 원석 두 개를 골라 작품 크기를 고려해 자른다. 그리고 작품의 높이 안에 들어갈 띠의 폭을 컴퓨터로 정교하게 계산하여 원석을 얇게 자른다. 틈이 생기는 것은 다음 과정이다. 슬라이스된 대리석을 떨어뜨리고, 불규칙하게 깨진 대리석 조각의 틈을 벌려 그 위에 다른 색 조각을 덧대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차곡차곡 쌓인 하나의 대리석덩어리 속을 파낸 뒤,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는다. 물론 작업에 정교한 계산이 필요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돌을 떨어뜨려 깨질 때 생기는 우연한 효과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생긴 불규칙한 단면의 틈이 단순한 형과 색으로 자칫하면 단조로워질 수 있는 그의 작품에 변화와 힘을 주는 것이다.
형과 색 모두에 충실한 박은선의 조각작품. 그렇다면 그 안에 내재된 의미는 무엇일까….
처음 그가 지금과 같은 방식의 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공사중인 도로에 교체하려고 세워 놓은 대형 하수도 파이프의 의미와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서라고 한다. 오물이 낀 낡은 하수도 파이프지만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는 것이다. 박은선은 예술작품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가 인간이 가장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형태인 구와 원기둥을 선호하고 자연재료인 대리석을 고집하며,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 역시 ‘삶’과 관계 맺는 작품을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와 원기둥으로부터 시작하여 옆으로 또 위로 뻗어나가는 박은선의 <무한 기둥> 시리즈는 원과 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여러 가지 모양을 그려 내는 어린아이들이나 영(0)과 일(1)이라는 두 가지 숫자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디지털처럼, 작고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 점차 복잡하게 뻗어나가는 ‘삶의 끝없는 확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은선은 지난 6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노화랑과 박여숙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번 전시는 1994년 이후 주로 유럽에서 활동해 온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 그것도 두 화랑에서 만나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그러나 실내에서 전시하기 어려운 엄청난 크기의 진정한 그의 ‘무한 기둥’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앞으로 삶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작업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확실히 구축한 박은선의 진정한 〈무한 기둥〉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신혜영
박은선 '젊은작가구역' (월간미술 2001.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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