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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Design≠Art)전〉(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 2004.9.10~2005.2.20)
도널드 저드의 침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조명, 솔 르윗의 파티션, 댄 플라빈의 접시, 로즈마리 트로켈의 러그. 그 이름만으로도 귀가 솔깃해지는 현대미술 작가들이 만든 디자인 오브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뉴욕 맨해튼의 쿠퍼헤윗(Cooper-Hewitt) 국립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Design≠Art)전〉은 ‘도널드 저드에서 레이첼 화이트리드까지 기능적 오브제들’이라는 부제가 그 내용을 잘 말해주고 있듯, 1960년대 등장한 ‘미니멀리즘’의 선두주자들과 그 혈통을 잇는 이른바 ‘포스트미니멀리즘’으로 불리는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낸 특색 있는 기능적 오브제들(functional objects)을 광범위하게 선보인 전시다. 작가 개인의 전시나 스튜디오에서, 혹은 디자인박람회와 같은 디자인의 맥락에서 이들의 디자인 소품이 공개된 적은 있으나, 뉴욕의 주요 미술관에서, 그것도 18명 미술가들의 디자인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은 처음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전시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 전시가 그저 흥미를 돋우는 이벤트성 전시가 아니라, 미술사 내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어 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논의될 수밖에 없는 ‘예술’과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 일견 자명해 보이는 이 짧은 명제 안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미술사 내에서 ‘미'와 ‘예술’을 둘러싸고 행해져 온 중요한 미학적 담론들이 숨어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미(美)’와 ‘용(用)’, 즉 ‘아름다운 것’과 ‘쓸모 있는 것’을 둘러싼 논의다. ‘예술’의 어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는 오늘날의 예술은 물론 모든 일상노동과 기술을 포함되는 바, 당시 미와 실용성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르네상스시기에 이르러서 건축․회화․조각과 같은 몇몇 분야가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고급학문과 인접 영역에 놓이면서 ‘미적인 것’은 ‘지적인 것’에 합류되고, 직인의 기술이나 공예와 같은 ‘실용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비천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렇듯 서로 다른 배에 올라탄 ‘미’와 ‘실용성’은 18-19세기 오늘날의 미술을 가리키는 ‘파인 아트(fine arts)’ 체계가 성립하면서, 각각 ‘예술’과 ‘현실’이라는 극과 극의 섬에 갇히고 말았다. 그 이면에는 샤프츠버리의 ‘무관심성’ 개념 ― 미의 줄거움이란 대상의 유용성이나 어떤 다른 관심과 결부되지 않은 채 순전히 형식에 반응하는 무관심적 심리상태라는 ― 이나, 이를 보다 공고히 한 칸트의 ‘목적없는 합목적성’ 개념 ― 사물의 아름다움은 어떤 목적에 부합하거나 그 안에 담긴 내용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에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형식에서 비롯된다는 ― 과 같은 미학적 뒷받침이 있었다. 예술로부터 모든 현실적 효용성을 제거한 이러한 형식주의적 관점은 근대 조형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미적인 것’은 오직 ‘예술’ 과 관계 맺고 ‘실용적인 것’은 ‘현실’과만 관계 맺어야 하는 엄격한 경계선이 성립하게 되었고, ‘미’와 ‘용’은 대척점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와 실용성의 분리는 ‘공예’를 ‘미술’로부터 분리했고, 미술 내에서도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근대 조형예술의 특징은 단순한 이분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순수미술’을 ‘공예’나 ‘응용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귀하고 정신적인 것으로서 여김으로써 미술을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하이아트’라는 철옹성 안에 가두어 놓고 말았다. 그러나 언제나 이론과 실제는 상충하는 법, 근대미학의 지향점과 달리 18-19세기 부르주아들의 실생활에서는 산업화의 진행과 그들의 문화적 우월감을 채우기 위한 현실적인 목적에 의해 일상용품에서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순수미술이 미술관이라는 성벽에 갇혀 소수에 의해 향유되는 동안 응용미술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이러한 근대 조형예술의 흐름 가운데 20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등장한 디자인은 ‘미’와 ‘실용성’에 관한 논의에 중요한 분기점을 마련하였다. ‘목적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데지그나레(designare)’를 어원으로 하는 디자인은, 인간생활의 목적에 합치하는 실용적이고 미적인 조형을 계획하고 실현하는 활동 일반을 뜻한다. 그 어원이 말해주듯 디자인은 실용성을 거점으로 미를 통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순수미술과 대척지점에 위치하며 공예나 응용미술의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은 그 조형적 특징이 오히려 동시대 미술과 유사하며 ― 현대 디자인의 주요 경향인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1960년대 미술사조인 미니멀리즘을 반영하는 것처럼 ― , 공예나 응용미술과 같이 순수미술에 대한 열등한 상대물이 아닌 주도적인 위치에서 미와 실용성을 통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근대 이후 건축이나 가구를 비롯한 일상의 오브제를 통해 미와 실용성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디자인의 노력은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우리의 실생활 곳곳에 디자인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만큼 그 세가 확장되었다.
^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침대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Design≠Art)전〉은 이러한 디자인의 세력 확장을 대변하는 전시다. 근대적 의미에서 순수미술이라는 절대 권력에 접근하고자 하는 ‘주변의 노력’이 아니라, 미술가들이 디자인한 일상 오브제들을 통해 예술과 디자인의 관계를 ‘대등한’ 지점에서 재조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들이 디자인을 회화나 조각만큼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고, 흔히 화가나 조각가로 알려진 이들이 실제로 가구를 비롯한 일상용품 디자인을 자신의 작품활동과 병행해 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 위치한 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이처럼 미술과 디자인을 대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그는 1971년부터 가구 디자인 작업에 몰두해왔다. 1971년 자신의 주 활동무대였던 뉴욕생활을 접고 텍사스의 작은 도시 마르파(Marfa)로 이사한 저드는 주변에서 쉽게 가구를 구할 수 없어 필요에 의해 가구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사물 자체에 대한 관심과 그로부터 비롯된 표면과 재료에의 천착, 오브제의 반복과 그로부터 비롯된 규칙성과 리듬감의 생성 등 저드의 미니멀 아트의 특징들은 그의 가구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가구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드는 주로 원목이나 금속 같은 기본적인 산업재료를 사용하여 재료의 특성과 질감을 그대로 살리고자 하였으며, 일정한 기본단위의 반복과 절제된 색채를 통해 단순함과 엄격함이 돋보이는 가구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의자는 의자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그의 언술에서 보여지듯 그는 가구디자인과 예술작품이 각기 상이한 목적을 실현한다고 보았다. 저드는 “의자가 기능적이지 않고 그저 아트처럼 보이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다”고 말할 만큼 디자인의 기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저드의 딱딱한 직선 의자를 보고 있노라면, 편안한 쿠션과 등받이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저 의자에 과연 몇 분이나 앉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드와 함께 이 전시의 주 전시장을 채우는 두 작가가 있다. 먼저 미국태생 미니멀리즘 조각가 스콧 버튼(Scott Burton)은 디자인과 미술을 분명하게 구분한 저드와 달리 자신의 작품 전체를 ‘가구/조각(furniture/sculpture)’이라 칭하며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예술계의 ‘엘리트주의’를 거부하고자 한 버튼은 자신만의 독특한 디자인 작업을 통해 예술애호가가 아닌 일반 관객도 알기 쉬운 예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리석이나 특수가공처리된 강철과 같은 고급스럽고 감각적인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동시대 미니멀리스트들과의 차별화를 꾀했던 버튼의 ‘가구/조각’이 대중을 위한 기능적 오브제로서 얼마나 합당할 지는 의문이다. 또 한 명의 예술가는 이번 전시에 저드만큼이나 여러 점의 작품을 선보인 미국작가 리차드 터틀(Richard Tuttle)이다. 현재 뉴욕의 드로잉 센터에서 전시가 진행중인 터틀은 1960년대 후반 이후 현재까지 회화, 조각, 드로잉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활동을 통해 미니멀리즘과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종합을 시도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여러 점의 의자들과 샹들리에, 램프 등 그의 디자인 오브제들은 ‘비례’와 ‘균형’의 요소를 이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공간을 조직하였다. 예를 들어, 나무 프레임과 붉은색 가죽쿠션으로 만들어진 의자세트는 두 개의 긴 의자와 두 개의 일인용 의자로 이루어져 하나의 응접실 세트를 구성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가구라기보다는 몬드리안의 회화처럼 선과 면의 비례와 조화가 돋보이는 한 편의 ‘입체적 추상화’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들 세 사람의 가구뿐 아니라, 가공하지 않은 소가죽 털로 된 리차드 아스와거(Richard Artschwager)가 만든 의자나 표면의 조각세공이 너무도 정교하여 만져서도 안 될 것 같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도자기세트와 같이 이 전시의 많은 디자인 오브제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품들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작품’으로서 ‘모셔놓아야’ 할 것 같은 거리감을 형성한다. 차라리 자신의 작업 컨셉트를 그대로 가구에 옮겨놓은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소파겸용 침대나 대형 스티로폼을 카우치 모양으로 자신이 직접 파내어 낙하산 천을 씌운 존 챔버린(John Chamberlain)의 대형소파를 대하는 마음이 더 편안한 것은 우리가 현대 설치미술에 길들여진 탓일까. 물론 자신의 유명한 원색 벽화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솔 르윗(Sol LeWitt)의 접이식 파티션이나 파스텔 톤의 색감이 아름다운 댄 플라빈(Dan Flavin)의 접시세트, 호르헤 파르도(Jorge Pardo)의 탐스러운 유리램프를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군침이 도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시된 대부분의 것들은 일반인의 경제력 범위를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쉽게 구할 수도 없다. 자신이 만든 디자인 오브제를 통해 진정 예술과 실제 삶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보기에 즐겁고 사용하기에 편리할 뿐 아니라, 일반인이 실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구입하여 소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의 ‘아카리(Akari)’ 램프는 꽤 고무적이다. 동양의 전통 한지와 나무틀의 변칙적인 사용으로 조형적인 면에서도 매우 아름다운 ‘아카리’ 램프 시리즈는 합리적인 가격과 효과적인 유통망 덕에, 1957년 처음 만들어진 이래 오늘날까지 조각가로서 그의 이름이 묻힐 만큼 전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만약 하나의 사물이 현실적으로 생산되고 소유될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술일지는 몰라도 디자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디자인을 통해 예술과 실제 삶을 연결하겠다는 훌륭한 포부를 가지고 출발한 예술가의 시도라 할지라도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결국 자기유희의 형태나 자기탐닉의 기회로써 디자인에 접근했다는 불명예를 껴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예술과 디자인의 관계는 ‘예술과 디자인은 분리되어 있다’는 저드의 주장과 ‘모든 가구(디자인)는 조각(예술)이다’는 버튼의 상반된 견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가가 바라보는 디자인이라는 한계점을 지니는바, 실질적으로 예술과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대등한 접근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 평범한 가구와 함께 색 테이프를 가져다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디자인하게끔 한 프란츠 웨스트(Frantz West)의 작품은 차라리 솔직하다. “예술은 어떻게 보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느냐의 문제다”는 언술과 함께 이 작품은 이 전시의 화두인 예술과 디자인의 관계를 관객에게 되묻고 있으며, 나아가 이미 ‘순수미술’로서의 자기완결성을 상실한 오늘날 예술의 위치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신혜영 (월간미술 2005년 2월호) ![]() ![]() (좌로부터) 1.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램프 2. 솔르윗의 파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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