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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현, 복도, 41 x 60.6cm, oil on cotton, 2004 2.13–3.12, 2008 PKM Gallery
스다의 꽃과 풀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달래, 백합, 튤립, 장미, 나팔꽃, 그리고 이름모를 잡초와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꽃잎, 줄기, 잎 등은 물론이거니와 얇은 수술과 가는 주름, 벌레 먹은 구멍까지 실제와 꼭 닮도록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되고 채색되어 놀라움을 준다. 전통 공예 도구를 사용하여 작가가 일일이 손으로 깍고 칠해 만든 그야말로 노동집약적인 이 조각작품은 이처럼 ‘실제와의 닮음’을 우선으로 하는 예술작품의 오랜 정의를 따르고 있다. 이 ‘극사실적인’ 조각작품은 정교함과 섬세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 공예의 전통적인 방식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며, 서양의 풍성한 꽃다발과 달리 간결함과 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의 전통 꽃꽂이 ‘이케바나(Ikebana)’의 맥락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이러한 점에서 스다의 조각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으며 현대미술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스다의 조각이 궁극적으로 꽤 신선한 현대미술로 다가오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전시되는 ‘공간 특정적인’ 방식과 작품 안에 모순되는 가치들이 상충하면서 이루어내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먼저 전시를 위한 공간을 검토하고 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을 조각으로 만들어 원래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위치 지운다. 스다의 조각은 좌대에 올려져 주목 받는 전통적인 조각과 달리 '바로 그 공간'에 무심한 듯 놓임으로써 더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역시 깨끗한 벽면에 조명을 받고 자리한 꽃송이 보다 바닥의 갈라진 틈에서 자라난 듯한 잡초가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스다의 조각이 지닌 공간 특정적인 전시방식의 효과가 강조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공간 특정성은 현대미술에서 더 이상 새로울 리 없을 만큼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타의 현대미술 대부분이 규모와 양을 자랑하는 일시적 설치물인 반면, 스다의 작업은 이미 견고하게 만들어진 조각물을 최대한 절제하여 꼭 놓아야 할 지점에만 놓음으로써 공간의 여백을 살리는 동시에 더욱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가져온다. 전체적인 전시는 매우 간결해 보이지만 그 간결함을 구성하는 개별의 조각물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매우 복잡한 인공물이며, 그것들은 금새 시들거나 부서질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 일회적이지 않은 영구적 조각물이다. 스다의 조각이 흥미로움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이처럼 현대성과 전통성, 일회성과 영구성, 간결함과 복잡함 등 상반되는 가치들을 한 데 담지하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빼어난 균형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혜영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먼저 성(城)에서 출발해보자. 성은 무언가를 높이 쌓아 올려 자신의 방어막을 만들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충실한 구조물로서 인류의 등장 이래 계속하여 다른 형태로 변모하며 존재해왔다. 누구나 어린 시절 블록이나 모래를 쌓아 올려 성을 만들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은 학습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 중 하나다. 이러한 수직적 쌓기에 대한 본능은 인간이 거주하는 건축물에도 반영되어 오늘날 높고 견고한 고층건물로 가득찬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성은 오늘날 도시에서 외형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본질적으로 내재하여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가로로 길게 연결된 스테이플러 철침을 필요에 따라 다른 길이로 잘라 레고 블록을 쌓듯 쌓아 올리는 김정주의 작업은 이러한 인간의 쌓기 본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술자들이 고도의 건축술로 고층건물을 올리듯 그녀는 그녀만의 숙련된 기술로 아찔한 높이의 빌딩을 쌓아 올린다. “유년기에 하던 놀이에서 발견되던 그 즐거움이 철침으로 집적된 오브제로 이루어진 공간들을 쌓게 만들었고, 이곳은 매우 정직한 놀이세계이자 현실에 휩쓸리는 동안에 유일하게 나를 보호해준 공간이었다. 즉 이상(理想)을 꿈꾸며 세운, 나의 욕망이 드리운 곳이다”. 작업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김정주의 작업은 쌓기에 대한 본능과 유년시절 경험한 쌓기의 즐거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집적 자체에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그녀의 작업은 더욱 높고 강력한 변형된 성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연작인 <The City>에서 작가는 빌딩숲, 고가도로, 대형교각, 건설현장의 타워크레인 등으로 구성된 도시의 수직적 이미지를 잘 보여주었다. <The City>에서 진수를 보인 이러한 김정주의 수직적 쌓기는 이번 <매직랜드> 연작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매직랜드>에는 성의 현대식 변형체인 고층건물뿐 아니라 첨탑을 가진 그야말로 중세시대의 성이 등장한다. 또한 회전관람차, 모노레일 혹은 롤러코스터 등이 공존하여‘매직랜드’라는 제목과 함께 놀이공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매직랜드>의 놀이공원은 꿈과 환상의 나라이기 보다는 삭막한 도시와 뒤엉켜 있는 낯선 곳이다. 사실상 어린 시절 모든 동화 속에 어김 없이 등장했던 성은 많은 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으로서 성인이 되어서까지 일종의 판타지로 남게 된다. 이른바 유년의 상징으로서 성은 자연스럽게 상상과 환상의 공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김정주는 성을 수직적 쌓기의 상징물에서 비현실적인 공간의 상징물로 확장시켜 비현실성의 대변체인 놀이공원으로 연결한다. 놀이공원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인 허구적 공간으로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현실로부터 차단해 일상의 삶을 망각하도록 만든다. 놀이공원의 형형색색 화려한 놀이기구와 미니어처 구조물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소비를 극대화하도록 완벽하게 짜여 있다. 이러한 연유로 놀이공원은 역사적으로 보다 높은 생산성을 가져오기 위한 일시적인 유희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세워져 왔으며, 대부분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 도시의 인위적 확장에 기여해왔다. 꿈과 환상이라는 기치아래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존재의 목적을 은폐하는 놀이공원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논리가 가장 잘 반영된 공간인 셈이다. 김정주는 성을 이러한 놀이공원을 대표하는 구조물이자 나아가 도시 전체의 상징물로 바라보고 있다. 오늘날 도시는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그 사실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굴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놀이공원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판타지를 대변하는 성과 그것이 확장된 허구공간인 놀이공원, 그리고 그 변형체인 도시의 구조물, 이 모두는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라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 서로 연결된다. 김정주의 <매직랜드>에 성과 여러 놀이기구들이 도시의 구조물들과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놀이공원이고 어디서부터가 도시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짜여진 <매직랜드>야말로 실재와 허구가 뒤엉켜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매우 적절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김정주의 <매직랜드>는 작가의 분명한 논리 아래 치밀하게 조성된 가상의 도시다. 이 새로운 도시는 날것 그대로의 금속성 재료와 어두운 색조의 화면으로 인해 꿈과 환상의 결정체인 성과 놀이공원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차갑고 황량하며 심지어 퇴락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놀이공원이나 도시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부분을 암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치밀하게 계산된 산업논리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구조와 이에 종속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시적 성장에 의해 가려져 있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은연중에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주는 놀이기구와 도시의 구조물을 어두운 배경에 차가운 금속으로 재현함으로써 대상의 형태와 이미지를 미묘하게 상충하도록 하여 그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전작인 <The City>에서 스테이플러 철침의 금속성 재질이 일차적으로 근대적 산업구조물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다면, <매직랜드>에서 동일한 재료는 구조물의 특성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의 인상을 주는데 기여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한층 작가의 주제의식이 분명해진 이 가상의 도시 <매직랜드>는 전작에 비해 내용 면에서도 심화되었지만, 형식 면에서 또한 발전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집적의 형태와 공간의 구조가 훨씬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최종적으로 사진으로 남게 되는 김정주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조형물 제작의 과정을 거친다. 스테이플러 철침을 일일이 손으로 뜯어 붙이는 이 무념무상의 노동집약적 과정에 있어 작가는 별다른 드로잉 없이 즉각적으로 구조물들을 만들고 전체적인 공간을 완성해 나간다. 그 곳에는 그 안에서만 작동하는 기계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구조물 하나하나는 실제 건물이 세워지는 것처럼 매우 정교하게 구축되며, 전체 공간은 실제 도시가 세워지는 과정처럼 중심 구조 위에 세부적인 요소들이 추가되어 하나의 거대한 도시로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이 거대 도시는 실제크기의 몇 천분의 일로 축소된 미니어처이다. <The City>에서 구조물들이 주로 스테이플러 철침의 직사각형 모양을 토대로 한 수직수평의 구조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매직랜드>에서는 곡선형 구조가 새롭게 시도되었다. 곡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침을 보다 작은 단위로 잘라 매우 정교하게 이어 붙이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선은 회전관람차, 롤러코스터, 원형경기장 등에 적용되어 <매직랜드>의 핵심적인 조형 요소로 자리하게 된다. 김정주의 <매직랜드> 연작은 수직적 형태의 기본적인 도시 구조물에 이러한 곡선 형태의 놀이기구들이 더해져 보다 풍부한 조형성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정주의 작업이 경쟁력을 갖는 것은 이러한 실제 조각물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변모시키는 최종적인 결과물의 이미지에 있다. 처음 김정주의 사진을 맞닥뜨린 사람은 차갑고 생경한 도시의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스테이플러로 만들어졌음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사실상 그것은 폭 1센티미터의 작은 철침을 이어 붙여 만든 작은 미니어처 도시에 불과하다. 만일 이 미니어처를 실물로 제시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솜씨 좋게 잘 만들어진 조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어쩌면 접착제가 묻어있거나 매끈하지 않은 형태에서 허점을 잡아내기에 바쁠지 모른다. 그러나 사진으로 재현된 김정주의 작품은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의 힘을 가지며, 실제 도시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분명 사진의 힘이다. 화면 속 대상을 실제로 느끼도록 환영(illusion)을 제공하고 사람의 눈과 다르게 이미지를 한정된 프레임 안에 담는 사진의 기본적 속성 덕분인 것이다. 또한 김정주의 작품은 다양한 각도와 부분 확대와 같은 카메라 워크에 의해 보다 풍부한 장면을 재현한다. 도시의 전체 구조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이미지나 구조물의 표면 질감을 강조하는 클로즈업 이미지는 사진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훌륭한 조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주는 이처럼 조각과 사진이라는 두 장르의 경계를 관통하고 있다. 조각을 사진으로, 즉 삼차원의 입체를 이차원의 이미지로 전환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정주의 이번 두 번째 개인전에는 사진 연작 외에 작가의 세밀한 펜 드로잉이 함께 선보일 것이다. 새롭게 시도된 이 드로잉 연작은 <매직랜드>의 연장선상에서 도시의 구조를 매우 가는 펜으로 정밀하게 묘사한다. 동식물 조직의 세포처럼 도시의 특정 지점마다 내재되어 있는 하부 중층(重層) 구조를 그린 <cell>이라는 제목의 이 드로잉들은 마치 <매직랜드>의 도시 아래 감춰진 복잡한 부분을 드러내는 듯 하다.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하게 스테이플러 철침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이 놀라울 정도의 밀도로 그려낸 드로잉들은 작가의 고유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장르간의 뚜렷한 경계가 무너지고 인접장르와의 혼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현대미술 안에서 필요에 따라 여러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은 작가로서 매우 유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뚜렷한 자신만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장르를 하나의 결로 변주해낼 수 있다면 말이다. 김정주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으로서의 도시를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하나의 큰 틀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의 가능성 많은 이 젊은 작가의 행보에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신혜영 |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
그림 속 사람들은 옆 사람과 몸이 닿지 않으려 애쓰면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밀집된 군중을 헤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때로는 길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잠시 우두커니 서있기도 하고, 식당, 편의점, 클럽과 같이 사람이 북적대는 일상의 장소에서 주변 사람들과 무심히 스쳐 지나기도 한다. 그들 모두는 언젠가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나 자신이며, 움직임이 정지된 그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구체적 인물과 상황이 묘사되어 있지만 인물들은 특정 개인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익명의 인간으로 다가오고, 그들이 처한 상황은 특별한 한 순간이기 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며 늘 겪고 있는 보편적 상황에 가깝다. 이렇듯 민재영의 그림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일반성은 우리에게 각자의 개별적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일상의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느꼈던 개인적인 감정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군중 속에 있어도 혼자인 듯한 외로움, 옆 사람과 살이 닿을 때의 묘한 느낌, 주변 동료들에게 느끼는 경쟁심,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는 동질감 등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감정들이 그것이다. 평소에는 묻혀 있던 일상의 한 순간에서 느낀 감정과 정서를 그와 유사한 장면과 맞닥뜨림으로써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다는 인간의 보편성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확인되기를 바라는 예술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실현되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그림의 형식적 측면이다. 민재영의 그림 대부분은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거나 사선으로 비껴 내려다보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이는 부유하는 인간 군상의 단면을 하나의 장면으로서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그러한 장면이 보편적 정서를 획득하도록 돕는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의 장면으로 인식하여 그 장면의 이미지가 부여하는 특정한 정서를 환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초기에 그녀가 작품 소재로 삼았던 영화 <희생>이나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처럼, 일상의 순간도 정지된 한 장면으로서 다가갈 때 어떠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자신의 그림에서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 상황 자체에 대한 몰입이라기 보다 특정한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경험인 셈이다. 민재영의 그림이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실제 작가는 동영상을 촬영하고 그 중에 자신에게 와 닿는 순간의 장면을 정지시켜 그림으로 옮긴다. 초기에는 사진을 이용했지만 사진이 움직임을 포착하기에 부적절하여 동영상 촬영 방법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려진 그림 속 인물들은 고정된 채 완벽하게 재현된 하나의 대상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중에 있는 실제 사람들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고, 전체적인 화면은 진행중인 어떠한 구체적 상황의 한 장면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한편, 이처럼 우리가 민재영의 그림에서 움직임을 인식하고 이미지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게 되는 데는 화면을 구성하는 가로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림의 전체 화면을 메우는 가로선은 영상화면의 주사선(scanning line)과 같이 중첩되어 특정한 형상을 드러낸다. 그녀가 처음 가로선 그림을 시도했던 것 역시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는 취지로 열린 한 단체전(<낯선 외출>, 1999)에서 전통적인 수묵화에 의도적으로 텔레비전의 주사선을 도입한 그림이었다. 마치 멈춤(pause) 단추를 눌렀을 때 주사선이 미세하게 떨리는 비디오 화면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가로선들로 채워진 민재영의 그림에서 움직임이 일시 정지된 하나의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민재영 그림의 가로선은 브라운관의 주사선과 외견상 직접적인 유사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더 근본적으로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갖는 형식적 한계를 극복하는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그녀에게 동양화의 선은 거부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대상의 깊이나 실재감을 표현하는 데는 밋밋한 윤곽선에 그칠 수밖에 없어 한계로 다가왔다. 또한 윤곽선 없이 한 붓으로 면을 만드는 것 역시 인물의 세부적인 부분을 묘사하기에는 둔탁하여 적절치 않았다. 그리하여 민재영은 동양화의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삽화성을 벗어나면서도 선이 지닌 특유의 맛과 세밀함을 고수하고자 여러 시도를 해왔다. 1998년 첫 개인전에서는 이미지를 하나의 선으로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여러 개의 선을 겹쳐서 형상을 그려냈으며, 이후 2001년 2회 개인전에서는 흐릿한 수묵의 세로선들을 중첩하여 인물 형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진화과정을 거쳐 나타난 것이 오늘날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이다. 또렷한 윤곽선 없이도 인물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그녀에게 지금의 가로선은 매우 적절한 방편이 된 것이다.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은 동양화 붓을 사용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수묵의 직선을 그은 후 그 위에 목탄으로 대략의 스케치를 하고, 그 이후부터 수묵이면 수묵, 채색이면 채색으로 짧고 긴 선을 무수히 중첩하여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방법은 선이 겹쳐지는 정도에 따라 명암이 조절되어 별다른 조작 없이 가로선만으로도 깊이와 양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매끈하게 한번에 그은 선과는 달리 형상이 고정되지 않고 진동하듯 흔들리며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이미지를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무수한 직선들로 이루어진 추상적 이미지가 거리를 두고 멀어질수록 서서히 또렷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은 기본적인 방식을 유지하되 계속하여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거의 수묵 위주였던 그림에 약간의 엷은 채색이 가미되다가 점차 진한 색채를 위주로 한 작품들이 강세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로선 그림은 색채 위주일 때 그 효과가 배가된다. 색을 섞지 않고 약간씩 다른 같은 색 계열의 물감을 겹쳐 칠함으로써 인접한 색과의 관계에 따라 색의 발현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채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색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기본 4색의 조합으로 무수히 많은 망점을 겹쳐 찍는 오프셋 인쇄와 같은 원리로, 작가는 먼저 한 계열의 색을 칠하고 다른 계열의 색을 칠해가는 식으로 색을 중첩해간다. 이번 전시에는 색채를 위주로 한 진채화와 먹의 농담으로만 이루어진 수묵화가 대조를 이루어 그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는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이 형식적 측면뿐 아니라 소재 선정과 제작 과정에서도 변화,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로부터 환기되는 정서를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동일하되 작품 소재의 범위를 일반적인 인간군상에서 특정 계층의 사람들로 좁힘으로써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번 전시에는 돋보인다. 예컨대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나 양복 입은 직장인들과 같이 계층을 알 수 있는 인간군상을 그린 그림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어떠한 정서를 환기한다.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 시절 여학생들이 지닌 특유한 정서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직장인의 특수한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어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는 현실적으로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밀집해있는 상황을 찾아내기 어려울뿐더러 원하는 정서가 배어나는 장면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을 연출하여 촬영하였다. 실재를 재연한 것이 실재보다 더 실제적인 까닭에 연출된 상황을 만들어 촬영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렇듯 민재영의 그림은 갑자기 변화하거나 도약하지 않았다. 선의 중첩으로 형상을 만들어내는 형식적 기법에서부터 도시의 인간을 다루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그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어 왔다. 또한 민재영은 누구보다 동양화의 기본적인 형식에 대한 연습이 충실한 작가다. 충분한 연습과 고민을 통해 동양화를 자신의 것으로 해석하고, 먹과 한지라는 재료를 한정된 요소로 제한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계속하여 발전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최근 전통과 동시대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 동양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전통적인 준법을 고수하는 산수풍경과 서양의 팝아트 캐릭터를 같은 화면 안에 넣어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시도하는 일군의 작가들과 달리, 그녀는 그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동양화의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 주변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 개인전 작업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민재영은 지나간 특정 시대의 모델이 전통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집적으로서의 ‘나’를 제대로 알아가고 현재의 자신에 충실함으로써 전통의 계승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동양화가 ‘우리의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닌 진정한 동시대 미술로 거듭날 수 있는 바람직한 하나의 방향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그녀의 작업을 계속하여 기대해도 좋은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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